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미국 영화) (문단 편집) == 기타 == * 2014년 9월 유고브에 여론조사에 의하면 58%에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영화를 본 비율은 이 책을 읽었다고 주장하는 20%보다 더 많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자신들이 본 영화들 중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 또는 아주 좋은 영화로 평가했다고 유고브는 설명했다. 그러나 유고브는 [[백인]]과 [[흑인]]에 대한 평가에는 차이가 있다고 발표했다. 이 영화를 본 백인 중 3분의 2는 이 영화가 아주 좋거나 더 낫다고 말하고, 흑인의 3분의 1만이 이 영화가 그렇다고 말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절반은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https://today.yougov.com/topics/politics/articles-reports/2014/09/28/gone-with-the-wind|#]] * 가장 먼저 촬영된 장면은 1938년 12월 10일 촬영된 애틀랜타 디포 화형 장면이었다. 촬영 중 큰 실수가 있었다면 영화 전체가 폐기됐을 수도 있다. 그들은 실제로 알라의 정원(1936년)과 킹콩(1933년)의 "만리장성"을 포함한 많은 오래된 세트들을 스튜디오 뒷마당에서 치워야 했다. 그 화재는 2만 5천 달러가 넘었고 113분 분량의 영상을 만들어냈다. * 1999년 NBC/월 세인트저널 여론 조사에서 28%의 미국 대중들은 20세기 최고의 영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꼽았다.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1위였다.[[https://today.yougov.com/topics/politics/articles-reports/2014/09/28/gone-with-the-wind|#]] * 해티 맥대니얼이 인종적으로 분리된 애틀랜타에서 시사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이 클라크 게이블을 격분시켜 그녀가 참석할 수 없는 한 시사회를 보이콧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녀가 그에게 가라고 설득하자 그는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 레트가 보니 탄생 후 마미에게 술잔을 기울이자, 촬영 중 농담으로 클라크 게이블은 실제로 해티 맥대니얼이 눈치채지 못한 채 술집에 평상시 차 대신 술을 따랐다. *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은 소설의 작가 마가렛 미첼에게 제작의 모든 측면을 비평해 달라고 간청했다. 극도로 사적인 사람인 그녀는 무시당한 타라의 디자인 면모에 대해 한 가지 비판을 했다. 그 후 그녀는 영화 제작 중 영화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 [[도널드 트럼프]]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그는 이 영화를 "고전이다. 그것은 세월의 시험을 견뎌냈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우리 진화의 중추적이었던 시기와 결합된 사랑 이야기다. 이야기의 범위가 엄청나다."고 평했다.[[https://www.cbsnews.com/pictures/donald-trumps-favorite-movies/11/|#]] [[기생충(영화)|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자 이 영화를 들먹이며 "제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시상식으로) 부를 순 없을까?"라며 기생충을 디스하기도 했다.[[https://m.newspim.com/news/view/20200221000488|#]] * 첫 상영 당시 아직 남북전쟁 참전자가 일부 살아있어 생존 장병들이 특별 초대되어 관람하기도 했다. * 이 영화가 개봉되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의견은 대체로 엇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인종차별주의라고 불렀고 몇몇 도시에서는 반대 시위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해티 맥대니얼의 따뜻하고 재치 있는 캐릭터화에 찬성하며 이 영화가 강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캐릭터를 특징으로 한다고 느꼈다. 다른 이들은 영화 속 흑인 배우들의 실제 묘사에 대해 더 양면적이긴 했지만, 흑인 배우들의 두드러진 역할의 사용은 다른 흑인 배우들의 영화판의 기용이 증가시킬 수 있다고 느꼈다. * 상술했듯이 한국에서의 영화의 저작재산권은 1989년에 소멸되었으므로 한글 자막이 첨가된 영화 전체를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Eo4T_nyRJgY)]}}}||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Kyjsex7g6M)]}}}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i-RM2F5W1QA)]}}} || * 유명 영화답게 미국 대중 문화에서 끊임없이 패러디되는 영화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hiOAFE64M4)]}}}||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LiuQ5rNuKAI)]}}} || * 스칼렛의 아들 웨이드 햄튼 해밀턴은 대본 초고에 있었으나 촬영이 시작되기 전 이야기에서 삭제되었다. 그는 영화에서 자신의 역할이 제거되기 전에 인쇄된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종이 인형 책에 등장한다. * [[마이클 잭슨]]은 1999년에 데이비드 O. 살즈닉의 오스카 작품상 트로피를 구입하기 위해 150만 달러 이상을 지불했다고 한다. 2016년 이 트로프가 없어졌다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https://www.hollywoodreporter.com/news/michael-jacksons-15m-gone-wind-867610|#]] * 이 영화는 1939년 9월 9일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의 폭스 극장에서 첫 시사회를 가졌다. 제작자인 셀즈닉, 그의 아내 아이린 메이어 셀즈닉, 투자자 존 헤이 휘트니, 편집자 할 C. 컨이 참석했다. 비록 영화의 정체는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관객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지만, 컨은 감독을 불러 이 영화의 첫 번째 공개 상영에 그의 극장이 선택되었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이름을 모르는 영화를 위해 서성거리고 싶지 않을 때만 떠날 수 있었지만, 극장에 간 후에는 재입고도 전화도 없이 밀봉될 예정이었다. 매니저는 꺼렸지만 결국 동의했다. 그의 한 가지 부탁은 아내에게 무슨 영화를 보려는지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당장 극장으로 오라고 전화를 걸어 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컨은 그가 비밀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전화를 하는 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 영화가 시작되자 관객들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의 2년 동안 이 영화에 대해 읽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영화를 직접 보게 되어 감격했다. 레슬리 하워드는 애틀랜타에서 열린 시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출연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초연 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 비비안 리의 조카 보 윌크스 역을 맡은 미키 쿤도 12년 뒤 비비안 리가 주연을 맡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에서 전차 탑승을 돕는 젊은 선원을 연기했다. 쿤이 어린 시절 리와 함께 연기한 적이 있다고 촬영장에서 누군가에게 언급했을 때, 소식이 전해졌고, 비비안 리는 그를 30분 동안 자기 탈의실로 불러 수다를 떨었다. 70대가 되어 한 인터뷰에서 쿤은 리가 자신에게 매우 친절했고 "그가 만난 여자들 중 가장 사랑스런 여자들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 [[주디 갈런드]]는 "앤디 하디" 연작의 공동 주연인 앤 러더포드가 캐스팅되기 전 스칼렛의 여동생 카린 역의 유력한 경쟁자였지만, [[빅터 플레밍]] 감독의 또 다른 영화인 <[[오즈의 마법사]]>에 출연하기로 약속하여 출연하지 못했다. * 멜라니를 연기하기 위해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이 영화의 대부분을 칙칙하고 진부한 복장으로 보냈다. 올리비아는 이 영화에서 멜라니와 애슐리가 약혼을 발표할 때, 그리고 멜라니가 스칼렛의 첫 결혼식에 입을 때 입는 인상적인 파란색 태페타 드레스를 입었다. 아쉽게도 당시(와이드스크린이 등장하기 훨씬 전) 필름 가로세로 인해 후프 스커트를 쌓아올린 드레스 두 벌을 스크린에 수용할 수 없어 제거해야 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드 하빌랜드의 보기 드문 외모가 치맛자락을 절룩거리며 허리에서 위로 쏘아져 나왔다. * 이 영화는 한 번도 잘린 장면이 없다. 일부 극장 재개봉과 홈비디오 공개는 삭제된 장면이 복원되고 추가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복원된 서곡, 중간 휴식, 엔트리와 퇴장 음악 때문에 더 길다. * 책이 출판된 지 한 달 후,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은 마거릿 미첼로부터 영화 판권을 전례 없는 5만 달러에 구입했다. 그 당시 그것은 작가의 첫 소설에 지불된 것 중 가장 높은 금액이었다. 그가 미첼에게 저임금을 줬다는 것을 깨달은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를 1942년 해체할 때 셀즈닉은 마거릿에게 보너스로 5만 달러를 더 주었다. * 토마스 미첼이 탄 말은 론 레인저 라이더스 어게인(1939년)의 실버였다. 말의 본명은 실버 치프다. 클레이튼 무어가 론 레인저(1949년)에 탔던 말이 아니다. * [[캐서린 헵번]]이 [[스칼렛 오하라]] 역을 탐냈다.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에게 "제가 스칼렛 오하라에요! 그 역할은 절 위해 써졌어요."(I am Scarlett O'Hara! The role is practically written for me.)라며 강하게 어필했지만 당시 헵번은 하는 작품마다 줄줄이 말아먹던 슬럼프 시절이라[* 당시 영화 제작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별명이 "box office poison"이었다.] 당시로선 전무후무한 막대한 제작비[* 이와 견줄만한 제작비가 [[벤허(1925년 영화)]] 정도인데, 벤허의 경우 너무 막대한 제작비로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1950년대 사극 대작 붐에 편승해 리메이크되기까지 무려 '''34'''년이 걸린다(...).]를 투자해 대작을 만드는 셀즈닉의 입장에선 말아먹으면 정말・진짜 큰일이기에 셀즈닉은 거절했다. * [[게리 쿠퍼]]가 [[레트 버틀러]] 역을 거절했는데, 그는 이 영화에 대해 열정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헐리웃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이 될 것이다. 그 실패작과 함께 나자빠지게 된 게 내가 아니라 클라크 게이블이라서 다행이다."[* "Gone With The Wind is going to be the biggest flop in Hollywood history. I'm glad it'll be Clark Gable who's falling flat on his nose, not me."]라고 악담한 적이 있다. 실상은 정반대였다. * 보도에 따르면 셀즈닉이 조지 큐코어를 감독으로 해임한 이유에 대해서, [[게이]]인 큐코어가 레트와 스칼렛의 애정 장면을 제대로 연출할 수 없기 때문에 마초 감독인 빅토르 플레밍으로 교체했다는 것이다. 비록 큐코어는 제작에서 해임되었지만 셀즈닉과 플레밍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주말마다 그들의 요청으로 비비안 리와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둘 다 개인 연기 코치를 계속했다.[[https://www.imdb.com/title/tt0031381/trivia?ref_=tt_trv_trv|#]] 비비안 리는 조지 큐코어가 메가폰을 잡고 있을 때는 연기를 즐겼지만, 후속 감독인 빅토르 플레밍의 무뚝뚝한 스타일에 만족하지 않았다. 비비안 리가 빅토르에게 한 장면에서 연기 방향을 물었을 때, 그는 비비안에게 단지 "힘내라."라고만 말했다. 비비안이 빅토르에게 건설적인 조언을 요청했을 때, 그는 비비안에게 "대본을 가져다가 그녀의 왕실 영국식 엉덩이에 붙이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큐코어가 떠난 후, 비비안 리는 영화의 스칼렛을 그녀의 시각에 충실시키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 했다. 플레밍의 그녀에 대한 해석은 소설에서처럼 그녀는 외진 여자애였고, 그녀에 대한 어떤 동정이나 통찰력을 만들어 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 마가렛 미첼 재단은 원작자의 죽음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관련 작품에 대한 권리를 유지해 왔다. 마가렛 미첼의 가족은 2011년 마지막 멤버인 조셉 미첼이 사망할 때까지 에스테이트의 지배권을 유지했다. 요셉은 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의 상당 부분과 재산의 50%를 애틀랜타의 로마 가톨릭 대교구에게 남겼다. * 영화의 대본은 거의 매일 바뀌었고, 출연자들은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대본의 최종본을 받지 못했다. * 이 영화가 "Dam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첫 번째 영화는 아니다 카발케이드(1933년)와 피그말리온(1938년)에서도 사용되었다. 후자는 영국영화로 미국의 엄중한 제재를 받지 않았다. * 멜라니아가 보니의 눈이 "보니 블루" 깃발처럼 파랗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조지아 주에서 탈퇴한 후 조지아 상공에 날아든 단일 별 분리 깃발의 인기 있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푸른 들판 위에 있는 하나의 하얀 별들로 구성되었다. 전통은 1861년 처음 몇 달 동안 조지아 상공을 날았다가 더 잘 알려진 "스타 앤 바"와 "배틀 플래그"로 대체되어 후년의 남부 연합 깃발이 된 "X자 모양의 십자가 깃발"로 대체되었다. * 애틀랜타의 저명한 전도사 마틴 루터 킹 시니어([[마틴 루터 킹]]의 아버지)가 이 영화 시사회에서 애틀랜타에서 열린 억만장자 무도회에 초대되었다. 그는 다른 지역 사회 지도자들로부터 영화 속 흑인 배우들 중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이 축제에 불참할 것을 촉구받았다. 시사회는 초대를 받았기 때문에 참석하였고, 그의 유명한 아들을 데리고 왔다. * 1939년 12월 15일 애틀랜타에서 초연을 위해 주지사는 주휴일을 선포했다. 시사회 티켓 가격은 보통 가격의 40배였다. * 비비안 리는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로렌스 올리비에]]와 사귀고 있었다. 그러나 올리비에가 뉴욕에서 무대 공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별거하게 되었다. 리는 그와 재회할 마음이 너무 강해서 촬영을 더 빨리 끝내기 위해 밤늦게까지 기꺼이 일을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항상 자신의 역할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했다. 그녀는 당시 아기를 낳은 경험이 없어, 멜라니가 아기를 낳는 장면을 위해 다양한 여성들이 출산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대처하는지 연구하기 위해 산부인과 병원을 찾았다. 오프 카메라, 이 장면의 감독인 조지 큐코어는 가끔 그녀의 발가락을 꼬집어 통증을 느끼게 하고는 했다. * 데이비드 O. 셀즈닉은 [[앨프리드 히치콕]]에게 여자가 샨티타운의 습격으로부터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멜라니는 "데이비드 카퍼필드"라고 읽는 장면에 대해 도움을 요청했다. 히치콕은 샷과 카메라 각도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 정밀한 방법을 조언했다. 그는 레트, 애슐리 등을 집 밖에서 보여주며 연방군 병사들을 피하고 또한 집 안에서 멜라니와 레트 사이에 의미있는 눈길의 교환을 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사실상 이 조언은 아무 것도 사용되지 않았다. * 대중성을 더하기 위해, 팬들에게 스칼렛 역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배우에게 투표하도록 요청받았다. 투표용지 수백 장 중에서 비비안 리는 단 한 표만 얻었다. 당시 비비안 리가 사실상 무명이었다는 점은 주목해야겠지만. * 비비안 리는 나중에 클라크 게이블의 입냄새 때문에 키스하는 것이 싫었다고 말했다. 그의 입냄새가 의치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사실은 [[골초|지나친 흡연]]의 결과였다. 이 영화 제작과정을 관찰한 기술자 프랭크 버킹엄에 따르면, 게이블은 때때로 비비안 리와 키스 장면 전에 마늘을 먹고는 했다. * 빅터 플레밍은 영화에서 적어도 한 번은 스칼렛이 사냥 친구 클라크 게이블의 타입의 여자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서 스칼렛이 애슐리 윌크스의 생일 파티에서 입는 코뿔소가 달린 멋진 저지 버건디 벨벳 드레스를 입을 때, 플레밍을 위해 원하는 갈라짐을 이루기 위해 월터 플런켓은 비비안 리의 가슴을 테이프로 함께 테이프로 붙여야 했다. * [[사우스웨스트 항공]]에서는 '''흡연이 가능한 날개 위 스카이 라운지에서 상영한다고 한다.''' 물론 해당 항공사에서 유머러스하게 기내 흡연 금지를 요청하는 것. * [[아돌프 히틀러]]가 좋아한 영화였다. [[비시 프랑스|파리 점령]] 후 부관들과 모여 점령을 축하하며 재밌게 봤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WVOFR0258fg,start=501)]}}}|| * [[장칭]]도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해서 몇번이나 다시 봤다. * [[김정일]]도 이 영화를 좋아했고 이로운 미국영화라고 측근들에게도 보게 해주었다. 2004년, 방북한 프랭크 자누지에게 김계관의 통역 최선희가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라고 대답해서 미국 측을 뒤집어지게 만든 적도 있었다. * 국내 트위터에서 영화 속 멜라니 캐릭터에 대한 여러가지 재해석이 담긴 어마어마하게 긴 타래가 만 단위 리트윗과 마음을 찍을 만큼 인기를 끌어서 2020년에 책으로도 나왔다. '다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 오하라를 사랑하시나요?' 라는 2권짜리 책인데 특이하게 사철 누드 [[제본]]으로 만들어서 어느 페이지든 완전히 펼칠 수 있게 되어 있다. * 영화배우 [[신영균(배우)|신영균]] 씨가 이 영화 촬영에 사용된 미셸 70㎜ 모션픽처 카메라 한 대를 수집해서 자기가 세운 신영영화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version=58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